오에노 히로모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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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에노 히로모토는 가마쿠라 막부의 창업 공신으로, 막부의 주요 정책 결정에 참여하여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교토 귀족과의 독자적인 연락망을 활용하여 요리토모 사후 호조씨의 권력 장악을 도왔으며, 조큐의 난에서 막부의 승리에 기여했다. 히로모토는 냉철한 성격으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막부 요직과 각지의 유력 호족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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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노 히로모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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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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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고쓰루마루 (幸鶴丸) |
출생 | 1148년 |
사망 | 1225년 7월 16일 |
묘소 |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주니쇼의 산중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니시미카도의 시라하타 신사 옆 (후대에 모리 씨가 정비) 야마가타현 니시무라야마군 니시카와정 아미다야시키 |
신분 및 소속 | |
소속 | [[File:Imperial Seal of Japan.svg|15px]] 일본 황실 [[File:Sasa Rindo.svg|15px]] 미나모토 씨 |
봉사 기간 | 알 수 없음 |
계급 | 다이묘 (영주) |
부대 | [[File:Japanese Crest Nagato mitu Hosi.svg|15px]] 오에 씨 |
주군 | 고노에 천황 고시라카와 천황 로쿠조 천황 다카쿠라 천황 안토쿠 천황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미나모토노 요리에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
막부 | 가마쿠라 막부 만도코로 벳토, 오쿠라 어소 구몬소 벳토 |
가문 | |
씨족 | 나카하라 씨 → 오에 씨 |
아버지 | 후지와라노 미쓰요시?, 오에노 고레미쓰?, 나카하라노 히로스에? |
형제 | 지카요시, 히로모토, 아키히로, 여동생 (다무라(후지와라) 나카노리의 부인) |
배우자 | 정실: 다다 히토쓰나의 딸 |
자녀 | 지카히로 나가이 도키히로 나하 무네모토 모리 스에미쓰 가이토 다다나리 손슌 미즈타니 시게키요 (양자) 딸 (아스카이 마사쓰네의 부인) 딸 (나카하라노 모로나리의 부인) 딸 (후지와라노 기미쿠니의 부인) |
관직 | |
관위 | 정4위하 |
역임 관직 | 명경득업생 누이도노노쓰카사 쇼게키 묘호하카세 검비위사 사에몬노조 소부노카미 효고노카미 다이젠다이부 무쓰노카미 |
영지 | |
영지 | 데와국 사카에 향, 나가이 향 (지토 직, 현지 목대로 다다 히토쓰나) |
2. 출신 및 가계
wikitext
가마쿠라 막부의 창업공신인 히로모토의 정확한 출신은 설이 분분하다. 오에 씨 족보(『江氏家譜』)는 후지와라 미쓰요시(藤原光能)의 아들로 생모의 재혼상대인 나카하라노 히로스에(中原広季)에게 양육됐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초기 일본 가계도 모음집인 《尊卑分脈일본어》에 실린 오에 씨 계보에는 히로모토가 오에노 고레미쓰(大江維光)의 아들로, 나카하라노 히로스에(中原広季)가 양부로 기재돼있다. 반면, 일본 초기 역사서이자 국문학서인 《続群書類従일본어》 속편에 실린 나카하라 씨 계보에는 나카하라노 히로스에(中原広季)가 아버지에, 오에노 고레미쓰(大江維光)가 양부로 기록돼있다.
히로모토가 조정에 출사한 초기에는 '나카하라노 히로모토(中原 広元)'라는 이름으로 신하 명단에 올라있다. 오에 씨로 고쳐부른 기록은 만년인 겐포 4년(1216년)에 종5위상(従五位上) 품계인 무쓰노카미(陸奥守)로 임관했을 때였다. 히로모토는 조정에 개명 신청을 상주했던 모양으로, 아즈마카가미에는 윤달 6월 14일 히로모토가 상소문에 양부 히로스에에게 받은 은혜가 크고 깊으나, 본가인 오에 씨의 쇠퇴를 보고 있기가 딱하여 생부 고레미쓰의 뒤를 이으려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15].
오에노 히로모토의 아버지는 오에노 고레미쓰(大江維光, 1110–1175)이고, 어머니는 불명이다. 정실 부인은 다다노 리쓰나(多田仁綱)의 딸이다.
- 장남 오에노 지카히로(大江親広)는 히로모토에 이어 만도코로 별당, 교토 수호 등 막부 요직을 역임했지만, 조큐의 난 때 히로모토와 절연하고 교토 조정 편에 섰다가 패배, 데와국 사가와(寒河江) 장원에 숨었다. 그의 후손들은 사가에 씨가 되었다. 지카히로의 적남 오에노 사후는 조큐의 난에서의 전공으로 시나노국 우에다 장(上田荘)을 얻어 우에다 씨의 조상이 되었다.
- 차남 나가이 도키히로(長井時広)는 빈고슈고(備後守護)에 올랐고 형 치카히로가 쫓겨난 이후 오에 씨의 적통을 이었다. 아들인 야스히데부터 효조슈에 올라 막부의 중요 사안들을 처리했다. 히로모토의 고손자인 무네히데(宗秀)는 요리아이슈에도 임명되어 아즈마카가미의 편집자 중 하나가 되었다.
- 삼남 무네모토는 기록이 없으나 그의 아들 마사시게(政茂)는 1239년에 좌근위감(左近将監), 1241년에 종5위하(従五位下) 품계에 올랐다. 1254년에는 종5위상 히키즈케슈(引付衆)에 올랐다.
- 사남 모리 스에미쓰(毛利季光)는 1216년인 16세 때 이미 종5위하 품계에 올랐다. 1233년 음력 11월 3일에는 효조슈에 올랐다. 1247년의 호지 전투(宝治合戦)에는 미우라 야스무라의 원군으로 나섰다가 패전, 미우라 일족과 함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위패를 모신 불당에서 자결했다. 그의 4남 모리 쓰네미쓰(毛利経光)가 에치고(越後)에 따로 떨어져 살았던 덕에 홀로 살아남아 영지를 인정받고 대를 이었다. 쓰네미쓰의 차남 모리 도키치카(毛利時親)가 남북조 시대에 남조(南朝) 편에 서서 아키(安芸) 요시다(吉田) 장원을 하사받았고, 센고쿠 시대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그의 직계 후손이다. 도키치카의 아들 대에는 에치고(지금의 니가타현) 동부의 유력 호족인 에치고 호조 씨(越後北条氏)도 나왔다.
- 5남 다다나리(忠成)는 1227년에 종5위하 품계에 올랐고 그 후 종4위하까지 올랐다. 1245년에 효조슈가 됐지만 호지 전투에서 바로 손윗형님인 스에미쓰와 함께 거병했다가 실패, 도주했다. 얼마안가 관직삭탈이 된다.
그 외 미카와 국(三河国)(지금의 아이치현)의 사카이 씨(酒井氏), 이나바국(因幡国)의 이나바 모리 씨(因幡毛利氏), 이즈모국의 다코 씨(多胡氏) 등등 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를 조상으로 하는 후손들이 많다. 물론 진위 여부는 논란이 많다. 대개 그의 후손들은 모토 「元」 나 히로 「広」 글자 등을 넣어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2. 1. 출신에 대한 여러 설
가마쿠라 막부의 창업공신인 히로모토의 정확한 출신은 설이 분분하다. 오에 씨 족보(『江氏家譜』)는 후지와라 미쓰요시(藤原光能)의 아들로 생모의 재혼상대인 나카하라노 히로스에(中原広季)에게 양육됐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초기 일본 가계도 모음집인 《尊卑分脈일본어》에 실린 오에 씨 계보에는 히로모토가 오에노 고레미쓰(大江維光)의 아들로, 나카하라노 히로스에(中原広季)가 양부로 기재돼있다. 반면, 일본 초기 역사서이자 국문학서인 《続群書類従일본어》 속편에 실린 나카하라 씨 계보에는 나카하라노 히로스에(中原広季)가 아버지에, 오에노 고레미쓰(大江維光)가 양부로 기록돼있다.히로모토가 조정에 출사한 초기에는 '나카하라노 히로모토(中原 広元)'라는 이름으로 신하 명단에 올라있다. 오에 씨로 고쳐부른 기록은 만년인 겐포 4년(1216년)에 종5위상(従五位上) 품계인 무쓰노카미(陸奥守)로 임관했을 때였다. 히로모토는 조정에 개명 신청을 상주했던 모양으로, 아즈마카가미에는 윤달 6월 14일 히로모토가 상소문에 양부 히로스에에게 받은 은혜가 크고 깊으나, 본가인 오에 씨의 쇠퇴를 보고 있기가 딱하여 생부 고레미쓰의 뒤를 이으려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15].
2. 2. 가계
오에노 히로모토의 아버지는 오에노 고레미쓰(大江維光, 1110–1175)이고, 어머니는 불명이다.[21] 정실 부인은 다다노 리쓰나(多田仁綱)의 딸이다.[21]- 장남 오에노 지카히로(大江親広)는 히로모토에 이어 만도코로 별당, 교토슈고 등 막부 요직을 역임했지만, 조큐의 난 때 히로모토와 절연하고 교토 조정 편에 섰다가 패배, 데와국 사가와(寒河江) 장원에 숨었다.[21] 그의 후손들은 사가와 씨가 되었다.[21] 지카히로의 적남 오에노 사후는 조큐의 난에서의 전공으로 시나노국 우에다 장(上田荘)을 얻어 우에다 씨의 조상이 되었다.
- 차남 나가이 도키히로(長井時広)는 빈고슈고(備後守護)에 올랐고 형 치카히로가 쫓겨난 이후 오에 씨의 적통을 이었다.[21] 아들인 야스히데부터 효조슈에 올라 막부의 중요 사안들을 처리했다. 히로모토의 고손자인 무네히데(宗秀)는 요리아이슈(寄合衆)에도 임명되어 아즈마카가미의 편집자 중 하나가 되었다.
- 삼남 무네모토는 기록이 없으나 그의 아들 마사시게(政茂)는 1239년에 좌근위감(左近将監), 1241년에 종5위하(従五位下) 품계에 올랐다.[21] 1254년에는 종5위상 히키즈케슈(引付衆)에 올랐다.
- 사남 모리 스에미쓰(毛利季光)는 1216년인 16세 때 이미 종5위하 품계에 올랐다.[22] 1233년 음력 11월 3일에는 효조슈에 올랐다. 1247년의 호지 전투(宝治合戦)에는 미우라 야스무라의 원군으로 나섰다가 패전, 미우라 일족과 함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의 위패를 모신 불당에서 자결했다.[22] 그의 4남 모리 쓰네미쓰(毛利経光)가 에치고(越後)에 따로 떨어져 살았던 덕에 홀로 살아남아 영지를 인정받고 대를 이었다.[22] 쓰네미쓰의 차남 모리 도키치카(毛利時親)가 남북조 시대에 남조(南朝) 편에 서서 아키(安芸) 요시다(吉田) 장원을 하사받았고, 센고쿠 시대의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그의 직계 후손이다.[22] 도키치카의 아들 대에는 에치고(지금의 니가타현) 동부의 유력 호족인 에치고 기타조 씨(越後北条氏)[23]도 나왔다.
- 5남 다다나리(忠成)는 1227년에 종5위하 품계에 올랐고 그 후 종4위하까지 올랐다.[21] 1245년에 효조슈가 됐지만 호지 전투에서 바로 손윗형님인 스에미쓰와 함께 거병했다가 실패, 도주했다. 얼마안가 관직삭탈이 된다.
그 외 미카와 국(三河国)(지금의 아이치현)의 사카이(酒井)씨, 이나바국(因幡国)[24]의 이나바 모리 씨(因幡毛利氏), 이즈모국의 다코(多胡) 씨 등등 오에노 히로모토(大江広元)를 조상으로 하는 후손들이 많다. 물론 진위 여부는 논란이 많다. 대개 그의 후손들은 모토 「元」 나 히로 「広」 글자 등을 넣어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3. 가마쿠라 막부에서의 활동
히로모토의 친형 나카하라노 지카요시(中原親能)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친분이 깊어 일찍부터 교토를 떠나 요리토모를 섬겼다.[5] 1183년(주에이 2년) 음력 10월, 지카요시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군세와 함께 상경하여 다이라 씨를 몰아냈고, 1184년(겐랴쿠 원년) 정월에는 요리토모의 대관으로서 정이대장군 대관식을 치렀다. 그는 귀족 신분으로 자신의 주군인 장군과 다른 교토 귀족들 사이의 교섭을 주선했다.[5]
이러한 친형의 인연으로 히로모토도 요리토모를 따라 가마쿠라로 내려가 구몬쇼(公文所)의 벳토(別当)직에 임명되었다. 요리토모가 우다이쇼에 오른 후 구몬쇼를 만도코로(政所)로 고쳐 정무를 시작했고, 히로모토는 벳토직에 유임되어 주로 교토와 가마쿠라 사이의 교섭을 맡았다. 그 외 분야에도 여러 가지 실무를 맡아 처리했다.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요리토모가 지방 슈고(守護職), 지토(地頭) 등 중앙집권 체제로서의 임명 지방관직을 설치했던 것도 히로모토의 제안이었다고 한다.[16][17][5]
히로모토는 막부가 가지지 못한 교토 귀족들과의 독자적인 연락망을 가지고 있어, 단순한 하급 관리가 아니라 정책 결정 및 시행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요리토모를 제외하고 가마쿠라 막부 인사들보다도 품계가 높았던 것이 그 예이다. 요리토모의 친동생 노리요리나 요리토모의 장인 호조 도키마사 등도 잘해야 주고이노게라는 낮은 품계에 머물렀던 반면, 히로모토는 쇼고이 품계를 받았다. 요리토모 사후에는 최고 실권자인 싯켄 호조 요시토키를 웃도는 쇼시이 품계를 받아 명목상으로는 쇼군 다음가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1199년(쇼지 원년) 요리토모가 급서하자 히로모토는 요리토모의 부인인 호조 마사코, 싯켄 호조 도키마사와 손잡고 2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를 막부 정치에서 배제시키는 데 성공했다. 3년 후 요리이에가 병석에 눕자 자신의 집으로 빼돌려 유폐시키고 결국 주살,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옹립했다. 조큐의 난 때는 장남 오에노 지카히로(大江親広)와 부자의 연을 끊고 적이 되기도 했다. 당시 아즈마카가미 기록에서는 히로모토가 주전론을 펼친 호조 마사코에게 협조, 교토 조정과 싸움에 주저하는 고케닌(御家人)들을 부추켜 승리를 이끈 장본인 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18][7]
와다 전투 때는 군사 모집과 영지 분배에 관해 히로모토가 싯켄(執権) 요시토키와 함께 고케닌들 명의로 연판장을 돌렸던 것이 남아있다.[19][6]
3. 1. 가마쿠라 막부 참가
오에노 히로모토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친분이 깊었던 친형 나카하라노 지카요시(中原親能)의 연줄로 가마쿠라에 내려가 구몬도코로(公文所)의 벳토(別当)직에 임명되었다.[5] 1183년(주에이 2년) 음력 10월에 나카하라노 지카요시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군세와 함께 상경했고, 1184년(엔랴쿠 원년) 정월에 요리토모의 대관으로서 정이대장군 대관식을 치렀다. 요리토모가 우다이쇼에 오른 후 구몬도코로는 만도코로(政所)로 바뀌었고, 히로모토는 계속해서 벳토직을 맡아 교토와 가마쿠라 사이의 교섭을 담당했다.[2] 그 외 분야에도 여러 가지 실무를 맡아 처리했다. 아즈마카가미[16]에 따르면, 요리토모가 슈고, 지토 등 지방관직을 설치한 것도 히로모토의 제안이었다고 한다.[17][5]1199년(쇼지 원년) 요리토모가 급서한 후, 히로모토는 요리토모의 부인 호조 마사코, 싯켄 호조 도키마사와 손잡고 2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를 막부 정치에서 배제시켰다. 1203년 요리이에가 병석에 눕자 자신의 집으로 빼돌려 유폐시키고 결국 주살,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옹립했다. 히로모토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히라가 아사마사, 와다 요시모리 등 호조 씨의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와다 전투 때는 군사 모집과 영지 분배에 관해 히로모토가 싯켄(執権) 호조 요시토키와 함께 고케닌들 명의로 연판장을 돌렸던 것이 남아있다.[19][6]
조큐의 난 때 히로모토는 장남 오에노 지카히로(大江親広)와 부자의 연을 끊고 적이 되었지만, 호조 마사코에게 협조하여 교토 조정과의 싸움에 주저하는 고케닌들을 부추겨 승리하는데 공헌했다.[18][7]
히로모토는 막부 창업에 뒤늦게 참가했지만, 교토 귀족들과의 독자적인 연락망을 가지고 있어 정책 결정 및 시행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요리토모를 제외하고 가마쿠라 막부 인사들보다 품계가 높았던 것이 그 예이다. 요리토모 사후에는 최고 실권자인 싯켄 호조 요시토키를 웃도는 쇼시이를 받아 명목상 쇼군 다음가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3. 2. 요리토모 시대
히로모토의 친형 나카하라노 지카요시(中原親能)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친분이 깊어 일찍부터 교토를 떠나 요리토모를 섬겼다.[5] 1183년(주에이 2년) 음력 10월, 지카요시는 미나모토노 요시쓰네의 군세와 함께 상경하여 다이라 씨를 몰아냈고, 1184년(겐랴쿠 원년) 정월에는 요리토모의 대관으로서 정이대장군 대관식을 치렀다. 그는 귀족 신분으로 자신의 주군인 장군과 다른 교토 귀족들 사이의 교섭을 주선했다.[5]이러한 친형의 인연으로 히로모토도 요리토모를 따라 가마쿠라로 내려가 구몬쇼(公文所)의 벳토(別当)직에 임명되었다. 요리토모가 우다이쇼에 오른 후 구몬쇼를 만도코로(政所)로 고쳐 정무를 시작했고, 히로모토는 벳토직에 유임되어 주로 교토와 가마쿠라 사이의 교섭을 맡았다. 그 외 분야에도 여러 가지 실무를 맡아 처리했다.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요리토모가 지방 슈고(守護職), 지토(地頭) 등 중앙집권 체제로서의 임명 지방관직을 설치했던 것도 히로모토의 제안이었다고 한다.[16][17][5]
히로모토는 막부가 가지지 못한 교토 귀족들과의 독자적인 연락망을 가지고 있어, 단순한 하급 관리가 아니라 정책 결정 및 시행에 있어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요리토모를 제외하고 가마쿠라 막부 인사들보다도 품계가 높았던 것이 그 예이다. 요리토모의 친동생 노리요리나 요리토모의 장인 호조 도키마사 등도 잘해야 주고이노게라는 낮은 품계에 머물렀던 반면, 히로모토는 쇼고이 품계를 받았다. 요리토모 사후에는 최고 실권자인 싯켄 호조 요시토키를 웃도는 쇼시이 품계를 받아 명목상으로는 쇼군 다음가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1199년(쇼지 원년) 요리토모가 급서하자 히로모토는 요리토모의 부인인 호조 마사코, 싯켄 호조 도키마사와 손잡고 2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를 막부 정치에서 배제시키는 데 성공했다. 3년 후 요리이에가 병석에 눕자 자신의 집으로 빼돌려 유폐시키고 결국 주살,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옹립했다. 조큐의 난 때는 장남 오에노 지카히로(大江親広)와 부자의 연을 끊고 적이 되기도 했다. 당시 아즈마카가미 기록에서는 히로모토가 주전론을 펼친 호조 마사코에게 협조, 교토 조정과 싸움에 주저하는 고케닌(御家人)들을 부추켜 승리를 이끈 장본인 중 하나로 기록돼 있다.[18][7]
와다 전투 때는 군사 모집과 영지 분배에 관해 히로모토가 싯켄(執権) 요시토키와 함께 고케닌들 명의로 연판장을 돌렸던 것이 남아있다.[19][6]
3. 3. 요리토모 사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오에노 히로모토는 그의 미망인 호조 마사코의 신임을 얻어 호조 씨(北条氏)의 권력 장악을 도왔다.[2] 1199년에는 실질적인 권력이 제2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로부터 영향력 있는 ''고케닌''들의 협의회로 넘어갔고, 1203년에는 쇼군이 그의 지지자인 히키 요시카즈와 함께 체포되었다. 히로모토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히라가 아사마사 및 와다 요시모리와 같은 적들을 호조 씨가 제압하는 것을 도왔다.[2]쇼지 원년(1199년) 요리토모 사후에는, 후처인 호조 마사코와 싯켄 호조 요시토키와 협력하여 막정에 참여했다.[6] 겐랴쿠 3년(1213년)의 와다 전투에 즈음하여 군세의 소집이나 소령의 소송에 있어서, 히로모토가 싯켄 요시토키와 함께 "연서"한 문서가 존재한다.[6] 조큐 3년(1221년)의 조큐의 난 당시 적자 지카히로가 관군에 붙었기 때문에 부자 상극하게 된다. 『아즈마카가미』는, 히로모토는 어디까지나 가마쿠라 편에 서서 주전론을 주장한 호조 마사코에 협조, 조정과의 일전에 신중한 고케닌들을 고무하여 막부군을 승리로 이끈 공로자 중 한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7] 조큐의 난에서 그는 교토에 대한 기습 공격을 주장하여 막부의 압도적인 승리에 기여했다. 그는 호조 야스토키의 계승을 지지한 후 사망했다. 그의 넷째 아들은 모리 씨를 창설했다.
3. 4. 조큐의 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사후, 오에노 히로모토는 그의 미망인 호조 마사코의 신임을 얻어 호조 씨(北条氏)의 권력 장악을 도왔다.[2] 1199년에는 실질적인 권력이 제2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로부터 영향력 있는 ''고케닌''들의 협의회로 넘어갔고, 1203년에는 쇼군이 그의 지지자인 히키 요시카즈와 함께 체포되었다.[2] 히로모토는 하타케야마 시게타다, 히라가 아사마사 및 와다 요시모리와 같은 적들을 호조 씨가 제압하는 것을 도왔다.[2]조큐의 난 당시, 히로모토의 적자 지카히로가 관군에 가담하여 부자간 대립하게 되었다. [7] 그럼에도 히로모토는 가마쿠라 막부 측에 서서 주전론을 주장한 호조 마사코를 도와 조정과의 전투에 신중한 고케닌들을 격려하여 막부군을 승리로 이끈 공로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다.[7] 그는 교토에 대한 기습 공격을 주장하여 막부의 압도적인 승리에 기여했고, 호조 야스토키의 계승을 지지한 후 사망했다.[2]
4. 평가 및 일화
만년에 "성인이 된 후로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고 담담히 술회했다고 한다.[20] 이는 히로모토가 정보다는 냉정한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예로 많이 거론된다.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가 쓰루오카 하치만구 참배를 앞두고, 히로모토는 "성인이 된 후, 저는 눈물을 흘린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눈물이 멈추지 않습니다. 이것은 심상치 않으니, 우대장(요리토모)이 대불전 개안 공양 때 기모노 아래에 하라마키(갑옷)를 입었던 예에 따라, 부디 하라마키를 입으십시오."라고 간언했다. 하지만 미나모토노 나카아키라가 대신에게는 그러한 선례가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사네토모는 하라마키를 입지 않았다고 『아즈마카가미』에 기록되어 있다.[8] 우에스기 가즈히코는 히로모토의 냉철한 이미지에서 역산하여 만들어진 에피소드가 아닌가 지적하고 있다.[9]
가마쿠라시 니시미카도에 오에노 히로모토의 묘라고 전해지는 것이 있지만, 이것은 에도 시대에 히로모토의 자손인 모리 씨의 조슈 번에 의해 만들어진 공양묘(참배묘)이며, 현지 전언에 따르면 가마쿠라시 주니소의 산중에 있는 오륜탑이 원래의 히로모토의 묘라고 한다.
조큐의 난에서 고토바 상황 측에 붙었던 적자 오에노 지카히로는 난의 종결 후 데와 국사이가에 장에 잠거하지만, 아버지 히로모토의 부고를 접하고 아들 오에노 사후에게 명하여 아미타여래를 만들게 하여 유골을 납입하고, 사이가에 장 깃카와(야마가타현니시무라야마군니시카와정)의 아미타당에 안치했다고 한다. 지카히로도 죽자 아미타당 곁에 장례되었다.
4. 1. 냉철한 정치가
만년에 "성인이 된 후로 눈물을 흘린 적이 없다"고 담담히 술회했다고 한다.[20] 이는 히로모토가 정보다는 냉정한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인물이었음을 보여주는 예로 많이 거론된다.가마쿠라에 오에노 히로모토의 묘가 남아있으나, 실은 에도 시대에 무명의 조슈 번(長州藩)사에 의해 추모의 의미로 만들어진 허묘(虛墓)라고 한다. 조슈 번의 도자마 다이묘인 모리 씨(毛利氏)의 조상이 바로 오에노 히로모토로, 주군의 조상에 대한 존경을 표시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가마쿠라 지방의 전설에 따르면 가마쿠라 시 주변 12곳의 산에 지어진 오륜탑(五輪塔)이 본래 히로모토의 유해를 나눠 안치한 묘라고 전해진다.
4. 2. 모리 가문과의 관계
오에노 히로모토의 가계는 가마쿠라 막부 성립에 공헌하여, 그 후손들은 막부의 요직을 맡거나 각지의 유력 호족으로 발전했다.장남 치카히로는 호조 요시토키의 사위로서 막부 요직을 역임했지만, 조큐의 난 때 조정 편에 섰다가 패배, 데와국 사가와 장원에 은거했다. 그의 후손들은 사가에 씨가 되었다.[21][10] 지카히로의 적남 오에노 사후는 조큐의 난에서의 전공으로 시나노국 우에다 장을 얻어 우에다 씨의 조상이 되었다.
차남 도키히로는 빈고슈고에 올랐고 형 치카히로가 쫓겨난 이후 오에 씨의 적통을 이었다. 아들인 야스히데부터 효조슈에 올라 막부의 중요 사안들을 처리했다. 히로모토의 고손자인 무네히데는 요리아이슈(寄合衆)에도 임명되어 아즈마카가미의 편집자 중 하나가 되었다.[21]
삼남 무네모토는 기록이 없으나 그의 아들 마사시게는 1239년에 좌근위감, 1241년에 종5위하 품계에 올랐다. 1254년에는 종5위상 히키즈케슈(引付衆)에 올랐다.
사남 모리 스에미쓰는 1216년 16세 때 이미 종5위하 품계에 올랐고, 1233년 효조슈에 올랐다. 1247년 호지 전투에서 미우라 야스무라의 원군으로 나섰다가 패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위패를 모신 불당에서 미우라 일족과 함께 자결했다. 그러나 그의 4남 쓰네미쓰가 에치고에 따로 떨어져 살았던 덕에 홀로 살아남아 영지를 인정받고 대를 이었다. 쓰네미쓰의 차남 도키치카가 남조 편에 서서 아키 요시다 장원을 하사받았고, 센고쿠 시대의 모리 모토나리가 그의 직계 후손이다.[22] 도키치카의 아들 대에는 에치고 동부의 유력 호족인 에치고 호조 씨[23] 도 나왔다.
5남 다다나리는 1227년에 종5위하 품계에 올랐고 그 후 종4위하까지 올랐다. 1245년에 효조슈가 됐지만 호지 전투에서 바로 손윗형님인 스에미쓰와 함께 거병했다가 실패, 도주했다. 얼마안가 관직삭탈이 된다.
그 외 미카와 국(지금의 아이치현)의 사카이 씨, 이나바국[24]의 이나바 모리 씨, 이즈모국의 다코 씨 등등 오에노 히로모토를 조상으로 하는 후손들이 많지만, 진위 여부는 논란이 많다. 대개 그의 후손들은 모토 「元」 나 히로 「広」 글자 등을 넣어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4. 3. 아라이 하쿠세키의 비판
5. 관직 이력
1148년 교토에서 태어나 나카하라(中原) 씨라 일컬었다.[25] 1168년 12월 13일 누이도노인(縫殿允)으로 첫 임관[25]했으며, 1170년 12월 5일 곤소게키(権少外記)에 임명되었다.[24] 1171년 1월 18일 소게키(少外記)로 전임되었다. 1173년 1월 5일 종5위하(従五位下)에 서품되었고, 이후 구조 가네자네(九条兼実)의 정무 감독을 맡았다.
1183년 4월 9일 종5위상(従五位上)에 서품되었다. 1184년 사가미국(相模国, 현재의 가나가와현) 가마쿠라로 내려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개인 정무기관인 구몬도코로(公文所) 별당(別当)에 올랐고, 9월 17일 이나바노카미(因幡守)에 서임되었다.[24]
1185년 4월 3일 정5위하(正五位下)로 승진했고, 4월 27일 요리토모가 공경(公卿) 귀족 반열에 오르면서 구몬도코로(公文所)를 만도코로(政所)로 개칭하고 별당(別当)직은 유지했다.[26] 6월 29일 이나바노카미(因幡守)직에서 사퇴했다.
1191년 4월 1일 묘호하카세(明法博士) 겸 사에몬대위(左衛門大尉)에 오르고 게비이시(検非違使)[27]도 겸임했으나, 11월 5일 묘호하카세(明法博士)직을 사퇴했다. 1192년 2월 21일 게비이시(検非違使)・사에몬대위(左衛門大尉)직을 사퇴했다. 1196년 1월 28일 효고노가미(兵庫頭)에 서임되었다.[28]
1199년 12월 9일 가몬노가미(掃部頭)로 전임되었다.[29] 1200년 5월 다이젠다이부(大膳大夫)로 전임되었다가 1203년 사퇴했다. 1206년 만도코로(政所) 별당(別当)직을 사퇴하고 장남에게 세습했다.
1213년 1월 5일 종4위상(従四位上) 품계로 승차했으며, 1214년 1월 5일 정4위하(正四位下) 품계로 승차하여 막부 신하들 중 최고 품계에 올랐다. 1216년 1월 27일 무쓰노카미(陸奥守)에 서임되었고, 윤 6월 1일 오에 씨로의 창씨를 교토 조정으로부터 윤허받았다. 8월, 전임 별당이던 장남이 난에 실패하여 지방으로 쫓겨나면서 만도코로(政所) 별당에 복직했다.
1217년 11월 10일 무쓰노카미(陸奥守)에서 사퇴하고 정계 은퇴 후 출가하여 가쿠가(覚阿)란 법명을 받았다. 1225년 6월 10일 서거했으며, 향년 78세였다.
참조
[1]
서적
Lust, Commerce, and Corruption: An Account of What I Have Seen and Heard, by an Edo Samurai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4-02-04
[2]
웹사이트
Manpukuji: Setting of a Great Samurai Tragedy
https://www.nippon.c[...]
2022-11-04
[3]
문서
大江氏の支配構造に関する一考察
[4]
문서
大江は本姓で苗字ではないため、大江広元は「の」を入れて「おおえ'''の''' ひろもと」と読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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しかし1960年(昭和35年)に石母田正がこの問題を詳細に分析し、これは幕府独自の記録によったものではなく、鎌倉時代の後期の一般的な通説に基づく作文ではないかと指摘した。そこから盛んな論争が巻き起こり(石井進『日本の歴史 7 鎌倉幕府』 天下の草創 p187-p195)、現在では広元の献策として「権門勢家の庄公を論ぜず、兵粮米(段別五升)を宛て課す云々」とあるは、「諸国平均」といっているのではなく、「五畿・山陰・山陽・南海・西海諸国」といっているものであり1185年の要求は源義経・源行家の捜索・追捕を名目とした一国単位の「国地頭」と「総追捕使」を要求したものであってしたがって「守護」職の開始はこのときではなく、建久元年(1190年)に頼朝が初めて上洛し、後白河天皇|後白河法皇や九条兼実らと合意の上で得た「諸国守護」を奉行する権限に始まる(岩波講座『日本通史巻8 中世2』 p61-p63)というのが定説となりつつある。
[6]
문서
『吾妻鏡』建保元年5月3日条及び「醍醐寺文書」所収建保4年2月15日関東下知状案(『鎌倉遺文』2210号)。
[7]
문서
ただしこれも「守護・地頭」の件と同様に、顕彰記事の疑いがあるともいわれている
2023-06
[8]
문서
歴史文化セレクション 鎌倉時代 その光と影
吉川弘文館
[9]
간행물
「大江広元」という「公務員」 : この国の「公務員」のひとつの「かたち」
https://hdl.handle.n[...]
[10]
서적
鎌倉争乱と大江一族
西日本新聞社
2005
[11]
문서
「広島市|広島」の地名は、元就の孫・輝元が天正17年(1589年)、広島城築城の鍬入れの際に毛利家の祖先である広元から一字を採って命名したといわれている(ただし諸説あり)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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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説として公文所・政所の両所並存・別当兼務説がある。
[13]
문서
모리박물관: 야마구치현 호후시(防府市) 타타라 잇쵸메 15-1. 옛 모리 번저 터 소재
[14]
문서
성(姓)인 오에는 가바네(姓)가 아니고 묘우지(苗字)이므로, 오에 뒤에 '노'를 붙여 읽는다.
[15]
문서
『吾妻鏡』閏6月14日の条. その申状(建保4年6月11日付、宣旨は同年閏6月1日
[16]
문서
『吾妻鏡』文治元年11月12日の条
[17]
문서
그러나 1960년에 이시모다 쇼(石母田正)가 여기에 대해 상세히 분석하면서, 히로모토의 헌책이라는 것이 사실은 가마쿠라 후기에 하나의 설로서 제시된 것이 통설로 자리잡은 것이 아닌가 지적했다. 여기서 논쟁이 크게 일어나 이시이 스스무(石井進)의 '일본역사 제7권(『日本の歴史 7) 가마쿠라 막부 편, 천하의 구사야리(天下の草創) p187-p195 에 실린 내용에선 히로모토의 지방관 설치 헌책 내용은 빠져 있다. 대신 히로모토가 했던 것으로 확인되는 권문세가(権門勢家)들의 지위고하에 따라 병량미를 공정하게 내야한다는 등의 사실적 헌책만이 실려 있다. 그 내용으로는,병량미는 전국평균(諸国平均)이 아닌 긴키 다섯지방(五畿), 산닌(山陰), 산요(山陽), 난카이(南海), 사이카이(西海) 지방으로 세분하여 징수할 것미나모토노 요시쓰네와 유키이에의 수색 및 체포 명목으로 지역단위로 고쿠치토(國地頭)와 총추포사(総追捕使)를 차출하도록 할 것이다이라 정권 때 설치된 치토우를 개정하기 위해, 요리토모가 1190년 상경하여 고시라카와 천황|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 및 섭정인 구조 가네자네(九条兼実)와 협의하에 전국 슈고(守護)직 설치와 행정관인 부교(奉行)의 권한을 설정할 것(岩波講座『日本通史巻8 中世2』 p61-p63)등등이다.
[18]
문서
아즈마카가미를 지은 것은 그의 후손들을 비롯한 고케닌 집안 출신의 신진관료들로 히로모토의 격려도 역사적 사실인지 판단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꾸며진 이야기로 보는 일본인도 많다.
[19]
문서
『吾妻鏡』建保元年5月3日条及び「醍醐寺文書」所収建保4年2月15日関東下知状案(鎌倉遺文 2210号)
[20]
문서
歴史文化セレクション 鎌倉時代 その光と影
吉川弘文館
[21]
서적
鎌倉争乱と大江一族
西日本新聞社
2005
[22]
문서
히로시마시의 지명은 모토나리의 손자인 모리 데루모토|데루모토(輝元)가 1589년 히로시마성을 지으면서 시조(始祖) 히로모토(広元)의 한 자를 받아 명명한 데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23]
문서
센고쿠 시대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센고쿠 다이묘 호조 씨는 사가미국|사가미 고호조씨|호조 씨로 따로 분류한다. 사가미 호조 씨는 헤이시의 후손으로 히로모토의 후손인 에치고의 기타조 씨와 동성이본이다. 에치고 기타조 씨는 시바타(新發田) 씨를 근거지로 나가오 씨와 우에스기 씨의 중신을 지냈다. 에치고의 기타조와 사가미 호조 두 집안은 적대 관계로 얽혀있었고 혈연 관계는 아니었다. 특히 사가미 호조 씨와 이름도 같고 같은 지역 기반으로 활동 시대가 전혀 다른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집안 호조(北條)씨와 구별하기 위해 사가미 호조씨를 특히 고호조(後北條) 씨로 구분하기도 한다. 호조 소운과 호조 우지야스 등이 사가미 호조 씨다.
[24]
문서
이나바(因幡): 현재 돗토리현 동쪽이며 우리 동해에 면한 지역
[25]
문서
누이도노(縫殿): 황궁의 궁녀 혹은 각종 직물을 관리하던 관청
[26]
문서
구몬도코로와 만도코로가 그대로 남아 양 기관 별당에 겸임됐다는 설도 존재함
[27]
문서
검비위사(検非違使): 중세 일본의 감찰기구 중 하나로 관원의 부정 비리를 적발해 바로잡는 역할. 오늘날의 검사 혹은 감사원의 역할을 맡음.
[28]
문서
효고후(兵庫府): 병량 및 군비 확충을 위해 설치된 중세 일본의 정부 기구
[29]
문서
까몬(掃部): 일본 황궁의 제례 및 궁중 청결 상태를 일임하는 중세 일본의 정부 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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